요즘 한국에서 친구들이 보내주는 소소한 일상 사진을 보면 그들이 눈치챘을지는 모르지만 내 눈에는 확연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작은 꼬마 전구라든가 트리, 빨간 무언가 등등 작게 나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소품이나 분위기 등등
한국이 빠르면 10월 말부터 부지런하게 크리스마스를 느낄 수 있는 반면 이집트는 12월이 들어서야 큰 쇼핑몰에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80%가 무슬림이 살고 있는 나라에 이곳의 콥틱 기독교인들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다. (러시아 정교회와 같음)
이집트에서 사귄 첫 친구인 나이지리아에서 온 캐이캐이와는 나의 첫 이집트 크리스마스와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냈다. 첫 해였던 작년에는 12월 거의 모든 주말에 만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쫓으려 신도시 중 하나인 쉐이크 제이드(El Sheikh Zayed City)에 있는 쇼핑몰들을 전전했고, 이브에는 마아디에 외국인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예배에도 참석했다.

올해는 캐이캐이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테니 참석하라고 연락이 왔다. 4~5명만 초대하는 작은 파티인데 여러 액티비티나 장식물 등도 구상해놓고 평소에 준비력 좋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초대장을 받고, 작년에 예상치 못하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에 보답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꼭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리라는 마음에 동네의 여러 기프트 샵을 전전했지만 마땅히 좋은 선물을 구하지 못했다. 🙃
쿠키와 볼펜, 과자와 부탁받은 와인을 사고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이 있는 종이백에 담아 약소하게나마 준비를 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이 있던 종이백에 15파운드(약 0.3USD)라고 적혀있었는데 막상 계산하려하니 45파운드로 가격을 올려받았다. 물어보니 종이백 가격(30파운드)에 트리 장식을 붙인 가격(15파운드)가 따로 책정이 되는 거란다. 정말이지 이곳의 상식은 이렇게나 다르다. 그래서 화가 날 때도 많지만 재미있는 일도 많다.
캐이캐이네 집에 도착하니 이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입구에 포토존이 마련이 되어있었는 비싼 돈주고 팔아도 될 것 같은 크리스마스 가랜드가 걸려있었다.

포토존에서 이런저런 사진을 찍으면서 노는 동안 이 친구의 고양이인 마야는 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야는 밖에서 본 것까지 포함하면 대여섯번은 본 거 같은데 좀처럼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포토존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음식이 한 껏 이쁘고 먹음직스럽게 차려져있었다. 캐이캐이는 옷 입는 것도 악세사리도 항상 잘 꾸미고 다닌다. 사진을 찍을 때도 본인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고 디테일에 매우 강하다. 그런 모습과 철저한 계획성이 파티 곳곳에 절로 나타났다.
처음 만날 때부터 캐이캐이는 몇 년간의 이집트 생활에 꽤나 신물이 난듯했고, 유럽에 가고 싶어했다. 친구들도 대부분 유럽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자유롭게 여러 다른 나라를 드나드는 한 편 본인은 유럽에 가는 거 자체가 꿈이다. 얼마 전에 이야기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유럽에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는게 커리어 목표라고 했다. 분명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국적과 비자의 벽에 가로막혀있어야 한다는게 정말 안타깝다.
살짝 수다를 떠는 동안 직접 제조한 드링크를 마시며 요기거리를 했다. 와인, 포도주스, 탄산수를 넣어서 만들었다는데 맛있어서 절반은 내가 마신듯하다. 지금도 계속 생각이 나는 맛이다.

그러고는 준비된 첫 번째 액티비티인 페인팅을 시작했다. 물감이 마르는 데 시간이 있으니 먼저 시작한 건데 오늘의 메인 활동이 되었다. 트리를 그리고 싶어서 레퍼런스를 찾다가 개가 트리를 끌고 가는 그림에 꽂혀서 개돌이가 트리를 끄는 그림을 그리려는데 그 개가 개돌이가 되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트리가 무거울 거 같고, 이게 개돌이가 원하는 게 맞나 싶고 혼자있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돌이를 그리고 싶어서 여러 다른 아이디어를 생각하다가 영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그리고 괜히 그림을 망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처음에 생각했듯이 트리를 하나 그리기로 했다.
어렸을 때는 다른 어느 또래들과 같이 혹은 그것보다 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거 같기는한데 크고 나서는 시각적인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디테일에 약한 무덤한 성향도 한 몫한 거 같다. 정말이지 몇 년만에 붓을 들고 물감으로 칠을 하니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좋은 과정, 결과물이 나와서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록색 물감이 질이 좋지 않아 색 발현이 안 되어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 집 어디 한 켠에 걸어둘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라우와라는 루마니아에서 온 친구와 캐이캐이 룸메 베네사와 베네사의 어머니(이번에 딸보러 잠시 이집트 놀러오심!)도 도착했다.
그러는 동안 마야가 좀 편해졌는지 거실로 나와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옆에 쇼파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이렇게 오래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같이 등에 종이를 대고 그림 그리기 게임도 했는데, 정말 해보고 싶은 게임이었는데 드디어 해봤다. 보기에 엄청 쉬워보여서 그냥 잘 따라그려서 재미없게 만들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꽤나했는데.. 결과물이 처참하게 웃겼다.ㅋㅋㅋㅋ

물고기부터 차례대로 그린건데 내가 가운데였다. 처음에 물고기 몸의 윗 곡선을 그린거 같은데 나한테는 그게 오른쪽 눈썹이었고 첫 시작부터 무너졌다..
다음에는 좀 더 얇은 옷을 입고 더 두꺼운 펜을 쓰고 좀 천천히 기다리면서 그리면 정확도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도 잘할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을 못 버리겠다.
다여섯시간을 같이 보냈는데도 준비한 다른 액티비티였던 풍선불어서 컵 옮기기는 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집을 떠나면서 남은 음식과 선물을 챙겨받았다. 진짜 이런 다정한 사람들은 타고 나는 건가 싶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난 다음 날 출근해서 여느 때와 같이 캐롤을 듣는데 아직 크리스마스가 되지도 않았는데도 한철 지나간 노래를 듣는 듯했다. 나한테는 이 날이 크리스마스였나보다.